기록

198*년의 기억을 기록하다

우리요미 2026. 2. 17. 21:46

  그날도 오늘같은 설날이었다. 살을 에는 바람이 여린 볼이 터버리도록 시렸다. 

언제나처럼, 여느 명절 때 처럼, 돈없고 아빠없는 우리 삼남매와 병약한 엄마는 부유한 이모집에 갔다. 자식새끼 뭐라도 하나 얻어먹이려 동생집에 애를 셋이나 줄줄 끌고 가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?

이모네는 이층집이다. 그리고 부자다. 하지만 그 집에 들어서면 뭔가 알 수 없는 향 냄새 같은게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. 

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. 언제나, 그림자처럼, 물처럼 엄마의 지시에 순종적이지만,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가난을 알아버린 철든 어린애였다.

새배를 했다.

그 집엔 나보다 한살 어린, 그 시절 열살이나 되었을까?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다. 이른바 부잣집 도련님. 딱히 나무랄 때 없는 그냥 애려닌 하고 말도 잘 안 섞던 얼굴 뽀얀 얼굴,  장난스러운 눈으로, 본인의 부유함을 온 몸에 무례함으로 바른 아이였다. 그 아이 차례가 되어 엄마에게 새배를 했다. 가난한 엄마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 100원짜릴 동전 다섯개를 그 아이에게 세뱃돈으로 주었다. 그 순간 이아이는 동전다섯개를 바닥에 내동대이쳤다.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. 가난과 소심함에 아무말도 못하는 나는 그 꼴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꼈다. 그러자 이모가 엄마에게 지폐를 쥐어주며 그걸로 새뱃돈을 다시 주라고 했다. 

거기까지다. 기억이 있는 건. 그 후에 어떤일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, 그 때의 나는 그 철없는 아이보다, 아이엄마인 이모를 향한 알 수 없는 감정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가 없다. 미움? 원망? 분노? 

  그 감정은 유년시절을 지나, 사춘기를 넘어 청년시기까지 정리되지 못하고, 가슴 속 깊이 쓴 뿌리로 내려뻗어가고 있었다.

그 때, 그 동전 다섯개를 주워 그 아이 면상에다 던져줄걸, 아니면 가난한 우리 삼남매 손에 쥐어줬던 부자 이모의 지폐를 한데 모아 똑같이 이모 앞에 던져버릴걸 . . . 하지못한 일로 마음은 정체모를 감정으로 뒤틀리고, 상처입고, 썩어가고 있었다. 

하나의 기억에 또 하나의 기억이 얹어지면서 상처는 딱지가 앉기 전에 다시 뜯겨 더 큰 상처로 자리잡던 세월들이 참으로 길었다.

수십년이 지난 지금, 철없고 버르장머리 없던 아이와, 흔해빠진 가진자들의 무례함 그 흔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그 뿐이었다고 정의하면서도 이렇게 글이 되어 끄적이는 것을 보면, 뒤끝이 긴 사람인 것이다. 나는.

  오늘, 설날 다복하고 따뜻한 날이었다. 시댁 식구들은 90대 아버지부터 서너살 조카 손주들까지 4대가 화목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.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 날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 행복한 날이었다.

그리고, 감사한다. 설움과 미움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던 스물네살 나를 칭찬한다. 신앙으로 인한 나의 성숙은 용서를 행할 수 있게 했다. 이해하든 미쳤다고 하든 젊은날의 치기로, 그렇지만 진심을 다해 용서를 전하는 편지를 썼다. 이모가 편지를 받고 어떤 표정일지는 궁금하지 않았다. 나는 그냥 내가 용서받은 사람이기에 이모와 그 아이를 용서한다고, 당돌한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지 못했다. 그 후, 이모댁은 사업이 잘못되서 야반도주하다시피 떠났다고 했고, 다시는 보지 못했다. 그리고 나의 어린시절 엄마나 이모보다 나이가 더 들어버린 나는, 삶이 피곤하고 어설프다가 일찍 천국으로 가신 엄마와 부자였지만 또 다른결로 성숙하지 못했던 이모를 생각하며 이상하게도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. 그냥 오늘의 나처럼 따뜻하게 지냈으면 좋았을 두 자매와 아이들의 과거가 아쉬움으로 남을거 같다. 단 하루라도 오늘처럼 그 시절을 떠올릴 날이 있었으면 젊은날의 내가 좀 덜 힘들었겠다 싶기도 하고.

하지만,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. 감사한 하루를 살고, 오늘을 천국으로 살면서, 때로 어려워도 다 지나감을 믿으며 사는 것이다.

오늘의 기록은 그냥 작은 기억.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기억을 잡아 빼내고, 오늘 행복했던 기억을 오래 담을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.

글을 쓰면서, 잊어도 될 기억을 잊고싶지 않은 기억으로 바꾸어 놓는 지금도 구수한 기억의 한 자락이 되길...